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= [[조지 맥거번]]의 부상 ==== 이 뉴햄프셔 대참사로 이득을 본 것은 [[조지 맥거번]] 팀이었다. 닉슨은 맥거번이 이기기 쉬운 만만한 호구라고 보고는 사보타지를 하지 않았고, 그 결과 맥거번의 지지가 오르게 된 것이다. 그 이후의 플로리다 프라이머리는 개판 그 자체였다. 여기서도 닉슨의 공작원들이 머스키 지지자로 위장해 스쿱 잭슨이 고등학생 때 사생아를 낳았고 험프리는 음주운전하다 체포됐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린 것이다. 물론 머스키한테 공작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. 뉴햄프셔 대참사로 무너진 지지율이 있음에도 여전히 머스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. 닉슨의 공작원들은 플로리다의 보수성을 이용해 머스키가 버싱을 지지한다는 말을 널리 퍼트렸고, 민주당 거물들에게 머스키 팀인 것으로 위장해 "살찐 고양이"가 아닌 소액기부를 원한다는 편지까지 보낸 것이다. 1등은 말할 것 없이 남부파의 수장 [[조지 월리스]]가 42%를 차지한 것으로 끝났지만 머스키는 비참한 8.9%(...)를 얻으며 4등 자리를 얻게 되었다. [* Nixonland 633-634p 참조.] 일리노이 프라이머리도 있었으나 대의원들이 성별 규칙 안지켜서 싹다 쫓겨나버린 바람에 의미는 없었다. 그렇게 4월이 되서는 [[에드먼드 머스키]] 상원의원, [[휴버트 험프리]] 상원의원, [[조지 월리스]] 앨러배마 주지사에 더해 [[조지 맥거번]]까지 선두주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. 이때 프라이머리가 열린 주는 위스콘신이었는데, 맥거번은 이 순간을 위해 온 힘을 다해왔다. 중서부의 강철 벨트 주로서 이 곳은 험프리와 맥거번이 자연스럽게 우위를 점할 만한 주였다. 이 주를 이기는 것이 맥거번 팀의 전략이었다. 그리고 폭격 이슈가 프라이머리 직전에 떠오르며 위스콘신에서 맥거번이 승리하게 되었다. 휴버트 험프리에게 있어 이는 충격적인 일이었다. 휴버트 험프리는 당 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AFL-CIO의 완전한 지지를 받는 등 대규모 선거운동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. 또한 자금 문제에서 가장 여유로운 인물이었다.[* 휴버트 험프리는 1968년 대선 패배 이후 LBJ의 조직을 물려받아 민주당 당권을 장악했는데, 이 때문에 맥거번 진영 측에서는 험프리가 민주당의 재정을 독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.] 게다가 위스콘신은 휴버트 험프리를 "세번째 상원의원"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사랑하던 주였다. 이런 주에서마저 풀뿌리 조직의 지지로 맥거번이 승리한 것이다. 심지어 월리스에게 밀린 3등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충격을 배로 만들었을 뿐이다. [* Nixonland 644-647p 참조.] 맥거번의 기세는 매사추세츠에서도 대승을 거뒀다. 어찌 보면 생전 [[로버트 F. 케네디]]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직접적인 후계자가 승리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. 매사추세츠에서 2등을 기록한 머스키는 맥거번과의 30% 격차에 좌절해 경선을 그만두게 되었다. 남은 민주당 존슨파의 희망 휴버트 험프리에게 위안이 된 사실은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승리였다. 조지 미니를 비롯한 AFL-CIO 등 노조 지도부는 험프리 하에 결집해있었다. 위스콘신은 온 힘을 쏟아부어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나 펜실베이니아에선 그렇게 할 수 없었다. 마침내 경선은 험프리의 기득권 대 맥거번의 새정치, 그리고 월리스의 소수파로 정리되는 듯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